
어떤 분이 카페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이미 손부터 모으고 있었다고 해볼게요. 약속 시간보다 겨우 3분 늦었을 뿐인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"미안, 나 때문에 기다렸지" 하고 사과가 먼저 튀어나온 거예요. 상대는 방금 도착해서 아직 메뉴판도 안 봤는데 말이죠.
A씨라고 해볼게요. A씨는 이런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어요.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먼저 내리려 하면 미안, 지하철에서 어깨가 살짝 스쳐도 미안,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도 "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"가 붙어요. 심지어 식당에서 물 한 잔 더 달라고 할 때도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가거든요. 본인도 알아요. 이게 너무 많다는 걸요. 그런데 입에서 먼저 나가버리거든요.
A씨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"괜찮아, 나 방금 왔어"라는 상대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거였어요. 사과는 형식이고, 속마음은 확인이었던 거죠. 내가 미움받지 않았는지, 이 관계가 아직 안전한지를요.
미안하다는 말이 많은 분들을 보면 잘못을 인정하려는 게 아닌 경우가 많아요. 오히려 관계에 금이 갈 조짐을 미리 지우려는 행동일 때가 있거든요. 상대가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낮아지면, 갈등 자체가 시작되지 않으니까요.
여기서 거절 못하는 이유가 슬쩍 보여요. A씨는 부탁을 받으면 거의 거절을 못 해요. 야근을 부탁받아도, 주말에 나와달라는 말에도 "어, 그래" 하고 대답부터 나가거든요. 그러고 집에 와서 혼자 서운해하는 거예요. 왜 나는 매번 이럴까, 왜 싫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할까 하면서요.
거절 못하는 이유를 파고들어 보면 대개 어릴 때 배운 하나의 공식이 있어요. 참으면 조용해진다, 내가 맞추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공식이요. 갈등이 생기면 크게 혼나거나 관계가 싸늘해지는 걸 겪은 분들은, 부딪히는 것 자체를 위험으로 학습하는 경우가 있어요.
그래서 미안하다는 말과 거절 못하는 이유는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와요. 둘 다 갈등을 피하려는 회피형 방어기제거든요. 나를 먼저 낮춰서 상대를 안심시키고, 부딪히는 상황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죠.

그런데 여기서 좀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져요. A씨는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고 계속 미안하다고 하고 계속 맞춰줬는데, 정작 가까운 사람들은 A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거든요. 뭘 좋아하는지, 뭐가 싫은지, 언제 화가 나는지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.
당연해요. 미안하다는 말로 속마음을 계속 덮어버리면, 진짜 내가 뭘 원하는지는 상대에게 전달이 안 되니까요. 거절을 못 하니 내 한계선도 안 보이고요. 안전해지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관계를 얕게 만들어버리는 순간이에요.
전환점은 아주 사소했어요. 어느 날 또 친구가 약속에 늦었는데, 이번엔 A씨가 먼저 늦은 게 아니었거든요. 그런데도 입이 근질거리는 거예요,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서요. A씨는 그 순간 처음으로 그 말을 삼켰어요.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"나 좀 기다렸어"라고 말했대요.
별거 아닌 것 같죠. 그런데 A씨한테는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사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내놓은 순간이었어요.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고, 친구가 떠나지도 않았고요. 오히려 친구는 "아 미안, 진짜 미안" 하면서 더 신경 써주더래요.

혹시 오늘 하루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떠올려보세요. 그중에 진짜 잘못한 일은 몇 개였을까요. 아마 대부분은 잘못이 아니라, 그냥 관계가 어긋날까 봐 미리 눌러놓은 안전장치였을 거예요.
당신이 미안을 많이 하는 건 나쁜 성격이라서가 아니에요. 부딪히는 게 무서웠을 뿐이고, 그렇게라도 관계를 지키려고 애써온 거잖아요. 거절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. 다만 이제는 나를 낮추지 않고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, 한 번쯤 작게 실험해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.
미안 대신 "나 이랬어" 한마디를 삼키지 않고 내놓는 것부터요.
당신도 이런 모습이라면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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